문헌록 전자족보(대동보) > 문헌록
           
1. 문헌 목록 〉6. 6世 〉45. <부정공>저존재기(著存齋記)절민공재실(節愍公齋室)
1. 문헌 목록 〉6. 6世 〉47. <부정공>相好亭 重建에 대한 感懷
1. 문헌 목록 > 6. 6世 >  
46.이로재기(履露齋記)
履露齋記 玉川治東瑞龍山下洞壑環抱峰巒拱揖其中突然而崇四尺封者故嘉善大夫趙公及其配淑夫人安氏之藏也嗣子寝郎夏榮營成一齋于其下名曰履露以寓攀栢羹墻之慕既而寝郎沒其胤壽弼仍附葬于此日必哭省霜露不廢時節薦享終始無怠盖趙氏始出玉川君中世有諱汝寬壬辰倡義殉節於錦山其貞忠大義輝映一世今壽弼遹追祖武克遵先訓則無愧爲賢父之子名祖之孫也壽弼之子樂鉉及其姑寂盧炅鉉以其畧記遠來請記遂檃括其語書此以還 完山 崔秉心 記 이로재기(履露齋記) 옥천군치의 동쪽 서룡산 아래 골짜기는 높은 산봉우리로 둘러싸 공손히 고개 숙인 듯한 형국 속에 우뚝 솟은 넉자 높이의 산소는 고 가선대부 조공과 그 배 숙부인 안 씨를 모신 곳이다. 그 아들 참봉 하영이 하나의 재실을 그 아래에 짓고 이로재라 이름하였는데 잣나무에 매달려 그 부모를 사모한다는 뜻에서 따온 것인데 얼마 있다가 참봉도 별세하고 그 아들 수필이 여기에 부장하고는 이 날이면 반드시 올라가서 성표하고 곡을 하였는데 서리와 이슬이 내리어도 폐하지 아니하고 계절 따라 제사 지내는 일을 시종 게을리지 아니하였다. 대개 조 씨는 처음 옥천군에서 나왔는데 중세에 휘 여관은 임진에 창의하여 금산에서 순절하였으나 그 정충대의는 일세에 밝게 비쳤는데 이제 수필이 고 조상의 자취를 뒤쫓아 사모하고 그 가르침을 능히 지키니 어진 아버지의 아들 됨에 부끄러움이 없는 명조의 손이다. 수필의 아들 낙련과 그 고숙 노경현이 멀리 찾아와서 재실기를 청하므로 드디어 그 대강을 이와 같이 썼으니 돌아갈지어다. 완산 최병심 기
 
1. 문헌 목록 〉6. 6世 〉45. <부정공>저존재기(著存齋記)절민공재실(節愍公齋室)
1. 문헌 목록 〉6. 6世 〉47. <부정공>相好亭 重建에 대한 感懷